제주 한 달 살기를 한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거기서 뭐 하면서 살아요?”
“일도 안 하면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아?”
나도 처음엔 막막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하루는 생각보다 금방 흘러갔다.
대단한 일정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충만했다.
내가 제주에서 보낸 하루를 그대로 적어본다.

1. 아침은 바다로 시작했다 – 함덕 산책 루틴
내 하루는 거의 항상 바다에서 시작됐다.
숙소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던 함덕해수욕장.
아침 7시쯤 가면 관광객은 거의 없고, 동네 주민들만 보인다.
강아지 산책하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그냥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
나는 이어폰도 끼지 않았다.
파도 소리랑 바람 소리를 그대로 듣고 싶었다.
모래사장을 천천히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됐다.
회사 다닐 때는 출근 준비하느라 늘 바빴는데, 여기서는 아침이 길었다.
어떤 날은 벤치에 앉아 30분을 멍하니 바다만 봤다.
처음엔 “이렇게 시간 써도 되나?” 싶었는데, 점점 그 시간이 제일 기다려졌다.
산책을 마치고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서 마시면,
그걸로 이미 하루의 절반은 성공한 느낌이었다.
2. 단골 카페와 혼자 가기 좋았던 장소
제주에서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동네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같은 카페를 반복해서 갔다.
처음엔 그냥 예뻐서 들어갔던 카페였는데,
세 번째쯤 가니 사장님이 “또 오셨네요” 하고 웃어줬다.
그 순간부터 그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내 동네 카페가 됐다.
나는 주로 창가 자리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만 봤다.
카페에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던 이유는,
그게 ‘도망’이 아니라 ‘회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혼자 가기 좋았던 장소는 따로 정해져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해변
-동네 도서관
-해 질 무렵의 오름
특히 오름에 올라가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숨이 조금 차오를 때쯤, ‘아 나 살아 있구나’ 하는 감각이 분명해졌다.
누군가와 여행 왔다면 대화로 채워졌을 시간이,
혼자일 땐 생각으로 채워졌다.
3. 일 안 하고 하루 보내는 법 – 나만의 퇴사 후 루틴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일 안 하면 하루가 너무 길지 않아?”
처음 며칠은 솔직히 길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느슨한 루틴을 만들었다.
🌿 나의 제주 하루 루틴
07:00 기상
07:30 바다 산책
09:00 아침 먹기
10:00 카페 or 글쓰기
13:00 점심 & 장보기
15:00 낮잠 or 독서
17:30 해 질 무렵 산책
20:00 영화 한 편
23:00 취침
중요한 건 “꼭 지켜야 하는 일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키지 못해도 괜찮은 루틴.
회사에서는 하루가 늘 촘촘했다.
제주에서는 일부러 비워뒀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았다.
메일도 안 쓰고, 보고서도 안 만들고, 결과물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도 괜찮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그동안 성과로 나를 증명하려고 했지,
존재 자체로는 인정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제주에서의 하루는 특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난 사건은 없었다.
드라마 같은 일도, 인생을 뒤집는 만남도 없었다.
대신 반복이 있었다.
바다, 카페, 산책, 혼자 밥 먹기.
그 반복이 나를 천천히 안정시켰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대단한 경험’이라기보다
‘조용한 재정비’에 가까웠다.
누군가 “그래서 제주에서 뭐 하며 살았어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나로 사는 연습을 했어요.”
일을 하지 않는 하루가 불안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루를 천천히 써도 괜찮다고 느끼게 됐다.
그게 내가 제주에서 얻은 가장 큰 변화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 바빠지더라도
그때의 아침 바다를 기억하면
나는 조금 덜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